르네 마그리트의 작품들

Posted at 2007/01/03 23:24// Posted in 스크랩/회화

초현실주의의 시기

마그리트는 1925년 경부터 일상의 평범한 사물을 화면에 도입해 신비하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거나 우리의 상식과 고정관념을 뒤흔드는 시적인 이미지를 창조해 내면서 자신만의 독자적인 초현실주의 세계를 개척하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선수, 1927 / 캔버스에 유채 / 152 x 195cm

보이지 않는 선수, 1927

자정의 결혼, 1926 / 캔버스에 유채 / 139.5 x 105.5cm

자정의 결혼, 1926

말을 가진 유기체, 1929 / 캔버스에 유채 / 41 x 27cm

말을 가진 유기체, 1929

중세의 공항, 1927 / 캔버스에 유채 / 97 x 74cm

중세의 공항, 1927


광고와 장식미술

마그리트는 화가로서 명성을 얻기 이전에는 가구와 벽지 디자이너로 생계를 유지했고, 화가로 유명해 진 이후에도 종종 광고와 장식미술 작품을 제작했습니다.

벨기에 섬유 노동자센터를 위한 포스터, 1938 두부분으로 콜라주한종이에 크레용, 과슈, 잉크 / 18.9 x 15.3 cm

벨기에 섬유 노동자센터를 위한 포스터, 1938

벨기에 섬유 노동자센터를 위한 포스터, 1938 / 두부분으로 콜라주한종이에 크레용, 과슈, 잉크 / 16.2 x 15.3 cm

벨기에 섬유 노동자센터를 위한 포스터, 1938


인상주의 시기

제 2차 세계 대전 중에 마그리트는 초현실주의에 대한 탐구에서 잠시 벗어나 인상주의의 화려한 색채와 표현적인 붓 터치를 도입한 작품들을 제작합니다. 이 시기의 작업은 독일이 벨기에를 점령했던 시기의 불안감과 억압적인 상황에 대한 역설적인 저항으로 해석됩니다.

지성, 1946 / 보드에 유채 / 54 x 65 cm

지성, 1946

천일야화, 1946 / 캔버스에 유채 / 50 x 65cm

천일야화, 1946

보물섬, 1942~43 / 캔버스에 유채 / 60 x 81cm

보물섬, 1942~43


검은 마술, 1927 / 캔버스에 유채 / 80 x 60cm

검은 마술, 1927



바슈 시기

1948년 마그리트는 야수주의의 화려한 색채와 거친 표현성을 도입해 야수주의를 풍자하는 역설적인 작업을 선보입니다. 불어로 암소를 뜻하는 바슈는 포비즘(야수주의)의 포브(야수)를 패러디 한 것입니다.

심리학자, 1948 / 종이에 크레용, 수채물감, 과슈 / 40.7 x 32cm

심리학자, 1948

굶주림, 1948 / 캔버스에 유채 / 46 x 55cm

굶주림, 1948

발렌시아의 롤라, 1948 / 캔버스에 유채 / 98 x 60cm

발렌시아의 롤라, 1948

매력적인 왕자, 1948 / 종이에 크레용과 과슈 / 32.8 x 32.7cm

매력적인 왕자, 1948



초현실주의 화풍으로의 복귀

인상주의 시기와 바슈 시기 이후에 마그리트는 다시 1930년대의 초현실주의 화풍으로 복귀합니다. 마그리트는 그 이유를 아내인 조제트가 이전의 화풍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붉은모델, 1953 / 캔버스에 유채 / 38 x 46 cm

붉은모델, 1953

대화의 기술, 1950 / 캔버스에 유채 / 65 x 81cm

대화의 기술, 1950

올마이어의 성, 1951 / 캔버스에 유채 / 80 x 60cm

올마이어의 성, 1951

기억, 1948 / 종이에 과슈 / 60 x 50cm

기억, 1948



1930년대의 회화의 복제

마그리트는 1930년대의 화풍으로 복귀하면서 그 당시에 그려진 작품들을 약간씩 변형시키거나 유화를 과슈로 다시 그리는 식으로 스스로 자신의 회화를 복제하기도 합니다.

여행의 추억, 1952 / 캔버스에 유채 / 14.3 x 19cm

여행의 추억, 1952

광활한 바다, 1951 / 캔버스에 유채 / 65 x 80cm

광활한 바다, 1951

신뢰, 1964-65 / 캔버스에 유채 / 41 x 33cm

신뢰, 1964-65

순례자, 1966 / 캔버스에 유채 / 81 x 65cm

순례자, 1966


말년의 작업

마그리트는 언제나 화가 대신 ‘생각하는 사람'으로 불리길 원했습니다. 말년인 1960년대의 작품에는 철학자처럼 끊임없이 존재와 세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그것을 그림을 통해 시각적으로 재현하고자 했던 마그리트의 철학적 회화관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진실의 추구, 1963 / 캔버스에 유채 / 130 x 97cm

진실의 추구, 1963

음악의 순간, 1961 / 종이에 붙이기, 수채물감, 콩테 / 24.1 x 26cm

음악의 순간, 1961

백지, 1967 / 캔버스에 유채 / 54 x 65cm

백지, 1967

심금, 1960 / 캔버스에 유채 / 114 x 146cm

심금, 1960




사진작가 "듀안마이클"의 사진

1956년 마그리트는 미국의 유명 사진 작가 듀안 마이클에게 그의 일상과 작업하는 모습을 찍을 수 있도록 자신의 집을 개방합니다. 마이클의 사진은 실재와 상상의 세계 사이의 교차점을 탐구한다는 면에서 마그리트의 회화와 유사성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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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né François Ghislain Magritte (1898-1967)



원문출처 :

르네 마그리트展
http://www.renemagritte.co.kr/4_1.htm

2007/01/03 23:24 2007/01/03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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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 역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보이지 않는 것의 형체를 그리려 하는 것은
너무 순진하고 어리석은 것이기 때문에
나는 보이는 것만을 그린다."

"나에게 있어 회화는 색채를 병렬하는 예술이며,
이런 방식을 통해 색채는 실제적인 면을 상실하고 대신
영감을 받은 사유를 드러내게 한다."



1898년 벨기에에서 출생한 마그리트는 1916년부터 브뤼셀의 아카데미 데 보자르(Academie des Beaux-Arts)에서 수학하면서 미술공부를 시작하였고, 이후 10여 년간 입체주의와 미래주의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을 제작한다. 그러나 1920년대 중반 경 조르조 데 키리코(Giorgio de Chirico)와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으면서 점차 자신만의 독자적인 화풍을 창조해 나가기 시작했고, 1927년부터 3년 간 프랑스 초현실주의자들과의 교류를 위해 파리에 머물기도 했다.

1925년 프랑스의 초현실주의자인 앙드레 브르통의「제1차 초현실주의 선언문」을 기점으로 결성된 초현실주의는 제 1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촉발된 다다이즘(Dadaism)의 정신을 이어받아 이성과 합리주의로 대변되는 서구문명 전반에 대한 반역을 꿈꾸었던 예술 운동이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꿈과 무의식의 세계를 탐구함으로써 이성에 의해 속박되지 않는 상상력의 세계를 회복시키고 인간정신을 해방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초현실주의자들이 자동기술법(Automatism)을 사용해 거의 추상에 가까운 작품을 제작했던 것과 달리 마그리트는 사과, 돌, 새, 벨, 담배 파이프 등 우리에게 친숙한 대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되 모순 되거나 대립되는 요소들을 동일한 화폭에 결합시키거나, 어떤 오브제를 전혀 엉뚱한 환경에 위치시켜 시각적 충격과 신비감을 불러일으키는 데페이즈망(depaysement) 기법을 이용한 작품들을 주로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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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그리트의 데페이즈망 기법은 어떤 사물을 원래 있던 환경에서 떼어내 엉뚱한 곳에 갖다놓는 '고립', 독수리를 돌의 재질과 같이 변형시키는 식으로 사물이 가진 성질 가운데 하나를 바꾸는 '변경', 성채와 나무 밑 둥을 결합하는 식의 '사물의 잡종화', 작은 사물을 엄청난 크기로 확대하는 식의 '크기의 변화', 평소에는 만날 수 없는 두 사물을 나란히 붙여놓는 '이상한 만남', 두 사물을 하나의 이미지로 응축 하는 '이미지의 중첩',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사물이 한 그림 안에 존재하는 '패러독스' 등의 방법으로 다양하게 등장한다. 

1950년대에 들어서 마그리트는 기존의 작업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양식의 작업을 선보이기도 하는데, 인상주의 시기와 바슈(vache) 시기의 작업이 그것이다. 인상주의 작가, 특히 르누아르의 영향을 반영하는 주제와 화려한 색채, 표현적인 붓 터치로 특징지어 지는 마그리트의 인상주의 시기 작품들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이 벨기에를 점령했던 시기의 불안감과 억압적 상황에 대한 저항으로 해석된다. 바슈 시기는 1957년 단 2주에 걸친 예외적인 실험으로 프랑스의 야수주의에 대한 영향과 동시에 풍자를 반영하는 작품들이다.

그러나 인상주의 시기와 바슈 시기를 제외하면 마그리트의 작업은 1930년대 초반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주제와 이미지(오브제의 데페이즈망, 단어의 사용, 인간의 조건, 중절모를 쓴 남자)가 평생의 작업에 걸쳐 다양하게 변주되어 등장한다고 할 수 있다. 


오브제의 데페이즈망 뿐 아니라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Ceci n'est pas une pipe)'로 대표되는 말과 사물의 관계를 다룬 작품들, 현실의 3차원 공간과 캔버스 위의 2차원 공간 간의 모순을 다룬 인간의 조건 등 마그리트의 예술은 우리의 상식과 고정관념의 틀을 깨고 우리가 속해있는 세계를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도록 요구한다. 기발한 발상, 관습적 사고의 거부, 신비하고 환상적인 분위기, 시적인 조형성 등은 초현실주의자로서의 마그리트의 면모이다. 그러나 초현실주의가 꿈과 무의식의 세계에 보다 경도되었던 것에 비해 마그리트의 작품은 철저한 계산에 의해 만들어진 논리적이며 철학적인 근거를 가진다. 실제로 철학에 조예가 깊었고, 화가라는 이름 대신 '생각하는 사람'으로 불리길 원했던 마그리트는 철학자처럼 끊임없이 존재와 세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그것을 그림을 통해 시각적으로 재현하고자 했던 작가였다. 그래서 마그리트의 작품은 단순히 보는 그림이 아니라 생각하는 그림, 상식을 뒤엎는 창의적인 사고를 자극하며 우리가 속해있는 세계를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도록 하는 철학적인 그림으로 평가받는다.

마그리트의 작품은 시대를 초월하고 동·서양의 구분을 넘어 음악(비틀즈의 음악과 애플 레코드사의 사과모양 로고), 영화(매트릭스 시리즈), 문학(김영하의 <빛의 제국>), 교육(대학 입시 논술 고사 문제로 출제) 등 다양한 영역에서도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으며, 마그리트를 초현실주의의 거장에서 더 나아가 20세기 미술의 거장으로 칭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들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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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작품에 관한 연구는 완벽한 지적 능력을 요하는 경향이 있어서 미술가의 미적, 회화적 관심사라기보다는 오히려 철학자의 탐구의 대상이다.

무미건조하고 사실적인 그의 양식은 종종 비회화적이고 아카데믹하다고 묘사되기도 하는데 이것은 명확한 사고를 보여 주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마그리트의 회화는 생각을 눈에 보이게 한다. 그러나 그 사고는 관념이 아닌 이미지와 함께 나간다.

이러한 회화의 의미는 기존의 어떠한 문학적인 설명이나 해석으로도 설명되지 않지만, 우리의 상식적인 믿음을 끊임없이 연구, 분석하고 존재의 모순을 조정하기 위하여 애쓴 철학자의 기질을 나타낸다.'

-수지 개블릭, 『르네 마그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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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의 과거를 싫어하고 다른 누구의 과거도 싫어한다. 나는 체념, 인내, 직업적 영웅주의, 의무적으로 느끼는 아름다운 감정을 혐오한다. 나는 또한 장식미술, 민속학, 광고, 발표하는 목소리, 공기 역학, 보이스카우트, 방충제 냄새, 순간의 사건, 술 취한 사람들도 싫어한다. 
 
나는 냉소적인 유머와 주근깨, 여자들의 긴 머리와 무릎, 자유롭게 뛰노는 어린이들의 웃음, 골목을 뛰어다니는 어린 소녀들을 좋아한다. 
 
어떤 초상화는 그의 모델을 닮으려고 노력하지만, 우리는 모델이 그 초상화와 닮기를 바란다. 
 
나는 고대 혹은 현대 미술과의 단절을 선언한다. 
 
나에게 있어 회화는 색채를 병렬하는 예술이며, 이런 방식을 통해 색채는 실제적인 면을 상실하고 대신 영감을 받은 사유를 드러내게 한다. 
 
나는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 역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보이지 않는 것의 형체를 그리려 하는 것은 너무 순진하고 어리석은 것이기 때문에 나는 보이는 것만을 그린다. 
 
나의 회화에는 상징이 존재하지 않는다.  상징은 시의 신비한 현실에 집착하기 위한 것이며 전통에 매우 충실한 생각에 속한다. 
 
초현실주의는 우리가 꿈을 꾸면서 가졌던 것과 유사한 자유를 실제 삶에서도 요구한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림에 가장 적절한 제목은 시적인 것이다.  우리가 그림을 감상하면서 느끼는 다소 생생한 감정에 비교될 수 있는 제목을 의미하는 것이다. 시적인 제목은 우리에게 뭔가를 가르치려고 하지 않고 우리를 놀라게 하거나 마법에 빠져 들게 한다. 
 
나는 영화예술의 기초를 이해하고 있지만  회화를 통해서만 나의 생각들을 표현 할 수 있다. 
 
말은 이미지가 보여줄 수 있는 것, 그것을 표현할 수 있다. 언어가 말할 수 있는 것, 그것은 이미지가 보여줄 수 없다. 그러나 그려진 이미지가 보여주는 것과 말로써 표현되어지는 것은 같은 것이다. 
 
나무 테이블의 다리들이 숲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였다면 그들에게 부여된 순수한 존재를 잃어  버린 것이다. 
 
나는 우리의 멋진 말들의 목에 매달린 쇠 방울들이 구렁텅이의 가에 있는 위험한 식물처럼 자라난다고 믿는 것을 더 좋아한다. 
 
여인의 나체를 하늘로 변화시키는 것은 마술의 행위이다. 
 
구와 집은 나무에게 불가사의한 방법들을 제안한다. 커튼은 쓸모없는 것을 감춘다 
 
<붉은 모델> 덕분에 우리는 인간의 발과 가죽구두의 결합이 현실에서 기이한 관습을 드러나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르네 마그리트


원문출처 :

르네 마그리트展
http://www.renemagritte.co.kr/5.htm


2007/01/03 22:44 2007/01/03 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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